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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마민중항쟁(88항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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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항쟁'의 발생 배경

‘88항쟁’은 군사정부에 대한 민중의 혁명적 저항이었다. 이 사건이 발발하게 된 근본적인 원인은 군사정권의 장기집권과 심각한 경제 침체였다. 이 항쟁은 1962년 ‘착취없는 공평한 사회’라는 이념을 내걸고 출범한 네윈 정권에 대한 저항이었다. 네윈 정권은 한때 비자본주의적 발전을 모범적으로 실현해 나가는 나라로 주목받기도 했지만, 폐쇄적인 통치 아래서 통제 경제의 비능률과 생산성 저하라는 구조적 모순에 빠지게 되었다.

네윈도 1974년 신헌법의 제정으로 문민화의 외양을 갖추었다. 그러나 버마식 사회주의의 실패를 부분적으로 자인하고, 그 폐단을 치유하기 위해 경제 개혁 및 자유화를 도입하였다. 그 결과 잠시 경제가 호전된 듯 하였으나, 이는 해외 차관에 의존하여 나타난 결과였다. 그리하여 외채 부담 증가 ⇒ 경제사정 악화 ⇒ 수입 규제 ⇒ 원자재 부족 ⇒ 공업 생산성 감소 ⇒ 내수용품 공급 부족 ⇒ 밀수와 암시장의 확산 ⇒ 물가 폭등으로 이어졌다. 특히 심각한 것은 쌀값 폭등이었다.

네윈 정권은 심각한 물자 부족과 암시장 확산을 막기 위해 1987년 9월 농산물의 거래를 일부 자유화했다. 그러나 이 조치는 부유층과 투기꾼의 이익만 보장하였고, 서민들이 주로 사용하던 특정한 화폐의 유통금지 조치를 취함으로써 폭발의 충분조건을 형성하게 되었다.

네윈 정권은 수도인 양곤과 만달레이 등에서 발생한 시민과 학생들의 시위에 군을 투입하여 강제 진압하였고, 대학을 비롯하여 모든 교육 기관을 일시 폐쇄시켰다. 이때만 해도 저항의 중심체는 학생이었고, 시민들은 소극적으로 동조하거나 관찰하고 있었다.

계속된 경제 압박과 어려움을 해소하기 위해 네윈 정권은 UN에 대해 외채 조정을 포함하여 우선적 원조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최빈국(LLDC)으로 분류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리하여 12월 정식으로 UN의 승인을 받았다. 그러나 대다수의 국민들은 이러한 사실들을 모르고 있었다. 이 사실이 널리 알려진 것은 1988년 3월 국회격인 인민의회를 통해서였는데, 국민들의 실망감은 극도에 달했다. 이러한 상황은 ‘버마식 사회주의’의 종말을 의미했다.

1988년 6월항쟁과 ‘88항쟁’의 준비기

버마민중항쟁1 3월 18일 양곤 대학교 앞 한 찻집에서 대학생들과 찻집 주인간의 작은 말다툼에서 시작되었다. 이 싸움은 지역 주민들이 가세하면서 하면서 확대되었는데, 이를 진압하기 위해 500명의 전투경찰이 투입되었고, 이 과정에서 폰 모라는 학생이 사망했다.

반면 싸움의 원인 제공자였던 한 청년은 그의 아버지가 정부 관리여서 방면 조치되었다. 이러한 차별적 대우에 대한 불만을 갖게 된 학생들은 인민위원회 사무실로 행진하였고, 시위가 시작되었다. 결과적으로 경찰의 과잉 진압이 그 동안 학생과 시민들 사이에 억눌려왔던 저항의 심지에 불을 당긴 것이었다.

강경파인 소 마웅 참모총장은 군인들에게 ‘파괴 분자’들을 철저히 진압하라고 명령했다. 군인들은 시위대에게 발포하였고, 사망자가 급격하게 늘어났다. 아울러 체포한 수백 명의 학생들을 악명 높은 양곤 북부 교외의 ‘인세인’ 감옥으로 호송하던 도중 41명이 질식사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날을 흔히 ‘피의 금요일’이라고 하는데, 이를 계기로 학교는 폐쇄되고 부모들은 자식의 소식을 몰라 애태웠다. 이 시위를 진압한 책임자는 ‘랭군의 도살자’라는 악명을 갖게된 ‘세인 르윈’이었다.

버마민중항쟁2 경찰과 군인의 잔인한 진압에도 불구하고, 시위는 수그러들지 않고 3월 18일부터 1주일 동안 계속되었다. 시위대에는 학생뿐만 아니라 시민들도 가세하여 양곤의 중심가에 있는 술래 파고다 거리에서 시위하였다. 그러나 시위는 더 이상 계속될 수 없었다. 26년 동안의 군사 독재 체제로 인해 야당은 물론이고 지하단체도 거의 존재하지 않았기에 사실상 반정부 세력들이 형성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시위는 곧 진압되었고, 대학은 폐쇄되었다.

대학이 개강한 것은 두 달여가 지난 5월 30일이었다. 이때 당국에 연행되었던 학생 200여명이 석방되어 대학으로 돌아왔다. 그러자 상황은 다시 격화되기 시작했다. 이들은 유인물과 얘기를 통해 감옥에서 당한 구타와 전기 고문, 그리고 여학생에 대한 강간 등을 폭로하였다. 이러한 잔혹 행위들은 학생들에게 3월 시위에서 경찰이 자행한 과잉 진압의 기억을 더욱 생생하게 했다.

6월초 시작된 학생들의 평화시위는 정부의 과잉 진압으로 다시 격렬해졌다. 1962년 네윈의 쿠데타 직후 해체되었던 양곤대학생연합 등 학생 조직이 다시 등장했고, 버고, 물메인, 프롬 시에서도 시위가 시작되어 항쟁의 불길이 전국적으로 확대되고 있었다.

버마민중항쟁3 노동자 심지어 승려들의 지원과 동조 시위가 이루어졌다. 그래서 6월 21일에는 약 5,000명의 양곤 대학생들이 주축이 되고, 전직 군인, 부두 노동자, 불교 승려들이 참여하는 대규모 시위가 발생하였다. 시위대의 요구 사항은 3월에 구속된 학생들의 석방, 당국의 장례식에 대한 강경 조치에 항의하는 것 등이었는데, 또 다시 군병력이 투입되었고, 9명의 사망자가 추가로 발생했다.

6월 23일에는 시위의 중심지였던 슈웨다곤 파고다와 모든 교육 기관이 다시 폐쇄되었고, 6월 24일에는 양곤에 통행 금지령이 내려졌다.

시위의 확산을 막기 위해 버마 제2도시인 만달레이와 버고 항에도 비상 사태가 선포되어 통행 및 집회가 금지되었다. 이 기간에만 해도 수백 명이 사망했다. 그리고 7월 22일에는 6일 동안 격렬하게 반정부 시위가 전개된 버마 북부 브롬 시(네윈의 고향)에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경찰과 군인을 동원한 극단적인 탄압에도 불구하고, 반정부 시위는 계속되었다. 그러자 7월 23일 집권 버마사회주의계획당(BSPP)이 경제난과 경제 개혁을 논의하는 긴급 당대회를 개최하였다. 그리고 성명이 발표되었는데, 내용은 BSPP의 당의장인 네윈이 사임하고, 9월말 경 유일정당 체제를 계속할 것인지, 다당제를 도입할 것인지를 결정하기 위한 국민투표를 실시하겠다는 것이었다.

네윈은 당대회에서 자신이 3월과 6월 유혈사태에 대해 책임이 있음을 밝히고 있었다. 또한 네윈의 사임과 더불어 산유 대통령, 아예 코(Aye Ko) 당서기장, 세인 르윈(Sein Lwin) 부서기장, 툰 틴(Tun Tin) 부수상, 캬우 틴(Kyaw Tun) 국방장관 등도 함께 사퇴서를 제출했다. 이로써 버마의 민주화운동은 일단락 되는 듯 했으나, BSPP의 당대회가 끝나던 7월 25일 새로운 사실이 발표되었다. 네윈의 후계자로 제1의 강경파인 세인 르윈이 당의장에 임명되고, 며칠 후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던 것이다. 르윈은 1962년 네윈의 쿠데타에 반대하는 학생 시와 1974년 발생한 반정부 학생 시위 그리고 1988년 3월의 학생시위를 처참하게 진압했던 장본인이었다.

당대회에서 네윈의 사임은 수리되었으나, 다당제 도입을 위한 국민투표안은 세인 르윈의 적극적인 반대로 채택되지 못했다. 이들의 의사는 분명했던 것이다. 즉 민간기업 확대, 외국회사와 합작 사업 장려 등 경제적 개방 정책으로 민심을 달래는 대신, 일당제 군사정부를 포기할 의사가 전혀 없었으며, 게다가 강경파에게 차후의 정국 관리를 맡기겠다는 노골적인 의도를 표현한 것이다.

당대회가 끝나자 학생들은 다시 거리로 나와, 반정부 시위를 다시 시작하였다. 주요 요구 사항들은 르윈 축출과 민주주의, 경제 개혁, 쌀 배급, 양심수 석방, 인권보장 등이었다. 자동차와 관공서가 불타고 가로수가 바리케이트로 사용되는 등 학생과 시민들의 시위가 맹렬했다. 군인과 경찰은 기관총을 난사했고, 또 다시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그렇지만 시위는 계속되었다. 7월 28일에는 대학생들이 학생연맹 승인을 요구하면서, 8월 3일에는 고등학생, 대학생 그리고 승려 등이 르윈 타도를 외쳤다. 결국 8월 4일 군사정부는 새벽 1시를 기해 양곤 시에 계엄령을 선포하였다.

버마민중항쟁4 선포된 것은 1974년 우탄트 전 UN사무총장 장례식을 기해 벌어진 반정부 유혈시위 이후 처음이었다. 그러나 정부의 판단은 오산이었다. 시위는 오히려 확산되었다. 8월 4일 시위대는 양곤 시내에서 경찰과 대치하여 르윈 사퇴 및 7월 29일 체포된 아울 지, 라 한 전 외무부 장관 등 20여명의 반정부 인사의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를 계속했다. 그리고 5일에는 이미 계엄령이 내려져 있던 머고 시를 비롯하여 다른 도시들에서의 시위가 시작되었다. 계엄령 하에서 유열 진압에 나선 경찰은 여전히 르윈의 지휘를 받고 있었다.

‘88항쟁’ 폭발기

버마의 전통적인 행운의 숫자인 ‘8’가 네 개 겹친 날인 1988년 8월 8일 ‘88항쟁’은 최고도에 이르렀다. 8일의 시위는 전버마학생민주동맹(ABSDL)이 주도하였는데, 양곤 시에서만 10여만 명의 시민들이 동참하였다. 만달레이를 비롯하여 14개 이상의 지방 도시와 읍에서도 시위가 계속되었다. 학생들이 주도한 시위는 전국적으로 확산되었고, 여기에 승려, 노동자 등 일반 시민들이 참여하였다.진압을 위해 처음 투입된 군대는 절제하고 있었으나, 여전히 시민들에겐 위협적인 존재였다.

시위대들은 수백만 명이나 되었으며, 시위는 평화로웠다. 시위는 밤을 지새우고, 다음 날까지 계속되었다. 시위대를 향한 계엄군과 경찰의 무차별 발포는 다음 날인 9일부터 시작되었다.

버마민중항쟁5 이날만 200여 명이 사망했다. 극단적인 폭력을 쓰지 않겠다는 공식적인 발표와 달리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총탄과 차량 그리고 도망치는 과정에서 죽거나 부상당했다. 시위대들은 10일부터 무장을 시작했고, 많은 경찰서를 접수하였다.

시위대는 진압군에 맞서 바리게이트를 치고 저항했지만, 탱크와 장갑차를 동원한 진압군을 막는 것은 한계가 있었다. 결국 100여 명의 사망자가 다시 발생했고, 수 천명이 부상했다. 병원은 사망자와 부상자를 모두 수용하지 못해 아수라장이었다.

시위대가 11일에는 버마 남부 주요 항구인 코아송과 버고 시를 완전히 장악하고, 빅토리아포이트 시의 경찰서를 접수했을 정도로, 시위는 전국적, 대규모, 그리고 격렬하게 진행되었다. 이 상황은 12일도 계속되었다.

이처럼 8월 8일부터 12일까지 버마 전역에서는 처절한 살육전이 전개되었고, 계엄군의 무자비한 진압에 분노한 시민·학생들이 경찰서를 습격, 무장 항쟁을 시작했던 것이다. 사망자의 숫자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으며, 시위대와 진압군 사이에는 시신 쟁탈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진압군이 시신을 빼돌려 화장함으로써 학살의 증거와 흔적을 지우려고 했기 때문이다.

군사정부는 12일 사망자수를 98명이라고 발표했지만, 당시 사태를 지켜본 외교관들은 최소 500명에서 최대 1,500명으로 추산했다.

이 시위의 결과로 르윈은 집권한지 17일만이 8월 12일에 모든 공직에서 사임한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후임자는 결정되지 않았다. 르윈의 사임은 버마의 민주화가 한 걸음 다가오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국민들은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구질서가 제거되고 새로운 질서가 형성되기를 갈망했다. 그러나 르윈의 사임은 민주화의 열망에 대한 확실한 비전을 주지 못했다. 그러자 또 다시 시위가 시작되었다.

버마민중항쟁6 만달레이에서는 승려들의 대규모 시위가 전개되었고, 버마 반군연합 지도자들은 진압군의 전면 축출을 촉구했다.

이날 학생운동 지도자들은 UPI통신에서 10개 요구사항을 제시하였다. ① 버마 집권 BSPP의 해체, ② 과도정부 수립, ③ 다당제 민주주의 실현, ④ 전국학생연맹 결성, ⑤ 모든 양심수의 석방, ⑥ 생필품 가격의 인하, ⑦ 민·군의 협력, ⑧ 내란 종식, ⑨ 국가의 단합, ⑩ 버마인의 생활 수준 향상 등이 그 내용이었다.양곤변호사협회도 26년만에 처음으로 정부에 대한 항의 성명을 발표하고, 시민들의 평화시위에 대한 불법 살상과 체포를 비난했다. 버마 국부로 추앙받고 있는 아웅산 장군의 딸인 아웅 산 수지가 바로 이때 처음 등장했다. 그녀는 “다당제 민주주의의 도입”과 “감시 기구의 설치”를 촉구하였다. 학생들과 시민들의 평화적인 시위도 계속되어 모든 양심수의 석방과 사망자 유가족에 대한 보상, 세인 르윈의 인민재판 회부, 일당 독재 종식 등을 요구하였다.

8월 17일 양곤에서 5천명, 만달레이에서 1만 명의 시위가 있었고, 8월 18일에는 다시 만달레이에서 10만 명, 모니와에서 25만 명, 양곤에서 15천명이 참가한 시위가 전개되고 있었다.

‘88항쟁’ 정리기

버마민중항쟁7 시위 속에서 BSPP는 8월 19일 새로운 당의장 겸 대통령으로 12일 사임했던 네윈의 법률 고문을 지낸 마웅 마웅 법무장관을 선출했다. 그는 BSPP 집권 26년만에 선출된 최초의 민간인 당의장이었지만, 이것은 전국민적 시위에 대한 회유책이었다. 마웅 마웅은 계엄령 해제, 진압 작전 중 구속된 정치 지도자들의 석방, 다당제 수용 등을 약속하면서, 사태를 수습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미 상황은 훨씬 진전되어 있었고, 민주화에 대한 요구 수준은 확장되어 있었다.

그의 임명이 발표되자마자 학생, 승려, 심지어 공무원까지 이를 전면 거부하고, 전국이고 동시다발적인 시위를 확산시켜 나갔다. 8월 20일에는 BSPP의 축출과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8월 22일이 전국 총파업의 날로 선정되면서 양곤을 비롯한 전국의 주요 도시들에서 각계 각층이 참가하는 시위가 일어났다. 반군세력인 커렌민족연합(KNU)과 카친독립조직(KIO)도 시위대를 지원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정치ㆍ군사면에서 시위대와 연대할 뜻을 밝혔다.

8월 23일에는 양곤에서 25만 여명, 만달레에서 공무원까지 가세하여 10만 여명이 시위에 참가한 것을 비롯하여 전국적으로 50만~70만 여명이라는 엄청난 숫자가 시위에 참여했다. 일단 마웅 마웅은 한발 후퇴하여 8월 24일 양곤 시에 내려진 계엄령을 해제하고, 군을 철수시켰다. 그리고 BSPP는 9월 12일 비상회의를 소집하여, 다당제 민주주의의 채택여부를 결정하기로 했다. 이 기간 동안 버마는 거의 무정부 상태와 다름없었다. 시민들은 이러한 상황에 대해 자신들의 승리했다고 생각하고, 100만 여명 이상의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환호성을 질렀다. 먼저 가시적인 성과는 8월 15일 아웅 지, 세인 윈 등 반정부 인사 10명과 시위가 진행되는 도중 체포된 시위대 1,694명의 석방이었다.

버마민중항쟁8 조치는 더욱 상승되어 양곤에서는 50만 여명이 BSPP 즉각 해체를 요구하며 행진을 하였고, 은행, 상점, 기업체, 관공서 등이 문을 당아 도시의 기능이 마비되었으며, 10여 개 도시에서는 행정기관이 시위대에 의해 접수되기도 했다. 버마 6개 국영 일간지도 BSPP지지 폐기를 선언하고 파업에 돌입했으며, 전국 각처의 교도소에서 죄수들이 폭동을 일으키고 탈옥하였다. 심지어 버마 육군사관학교 교관단이 군에 대한 불복종 선언을 하며 장교들의 동참을 촉구하였다. 이에 BSPP 관리 109명은 일괄 사표를 제출하였다.

이제 버마는 새로운 정치 지도자를 요구했다. 이에 8월 25일 아웅 지, 아웅 산 수지, 전 참모총장 틴 우와 반정부 단체들이 공동 전선 회담을 갖고, BSPP의 즉각 해체, 6개월 내 총선 실시를 위한 임시정부 수립 등에 합의하였다. 특히 이때 이미 이름이 거명된 적이 있었던 아웅 산 수지는 아버지 아웅 산 장군의 후광을 업고 버마 민주화의 상징으로 부상하였다.

28일에서야 버마 6개 일간지가 발행을 개재했는데, 아웅 산 수지 등 반정부 지도자들의 사진과 함께 시위 상황을 보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당일 민 코 나잉을 위원장으로 하는 ‘전버마학생연맹’이 결성되었다.

29일에는 26년만에 처음으로 우 누의 주도하에 ‘민주화평화연맹’이라는 야당이 결성되었으며, 전국 주요 도시에 시위대가 주도하는 도시인민위원회가 설치되었다. 30일에는 국영기업 종사자들의 총파업위원회 결성, 외부무 직원들의 정부 비난 성명, 전국 지휘관 85명의 임시정부 수립안 지지 성명, 청년 승려 연맹이 결성되었다.

6일에는 외무부 전직원 187명이 사임을 발표하였으며, 9월 9일에는 민주화평화연맹의 임시정부 수립 선포, 그리고 공군 병사 252명의 군 이탈 등 폭발적인 사건들이 연일 계속되었다.

물론 시위도 계속되어, 9월 1일에는 양곤에서만 50만명이, 9월 2일에는 몰메인에서 수십만 명이, 9월 3일에는 모니와에서 공무원과 경찰관이 가담한 30만 명이, 9월 5일에는 양곤에서 10만 명이, 그리고 9월 8일에는 총파업 재돌입과 함께 전국적으로 250만 여명 이상이 시위에 참여하였다.

이러한 폭발적이고 혁명적인 국민의 지지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정치 세력으로 거명된 사람들이 민중항쟁을 효과적으로 수렴하고 진전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일단 그들은 민주화 운동에 대한 경험이 전무하였다. 그래서 국내에서 자신들의 정치력을 확대해가고, 국외에서 자신들의 주장에 대한 인정을 받을 수 있는 방안을 찾지 못했으며, 갈등 관계가 형성되어 있었다.

오히려 국민의 시위에 진전된 반응을 보인 것은 BSPP였다. 9월 10일 다당제 도입 여부를 국민투표에 부치겠다는 지금까지의 발표를 철회하고, 직접 다당제 총선을 실시하겠다고 발표한 것이다. 이어서 9월 11일 버마 인민회의는 긴급 전체 회의를 열고 앞으로 3개월 이내에 다당제에 의한 민주주의 총선을 실시하며, 다당제 승인에 따라 BSPP가 버마의 유일한 정당이라는 헌법을 개정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런데 BSPP의 발언 뒤에는 날카로운 통제의 칼날이 숨어 있었다. 마웅 마웅은 법과 질서를 지키지 않고 폭력에 호소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단호한 조치를 취할 것이며, 총선 실시 때까지 BSPP가 권력을 유지할 것이라고 밝혔던 것이다.

버마민중항쟁9 세력들은 이를 비판하고, 과도정부가 수립될 때까지 시위를 계속하겠다고 밝혔는데, 이들은 아직도 버마를 군이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이제 선택을 길은 두 가지 뿐이었다. 하나는 총선을 실시할 때까지 BSPP의 권력 유지를 인정하는 토대 위에서 버마 군부가 제시하는 일정에 맞추어 다당제 총선을 치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총선 실시를 위한 전제 조건으로 임시정부의 수립을 요구하는 시위를 계속하는 것이었다.

전국학생연합뿐만 아니라 아웅 산 수지, 우틴 우, 아웅 지 등은 후자의 방법을 선택하여 지속적인 반정부 시위와 투쟁을 전개하였다.